마늘 이야기

마늘의 역사

자연의 금(gold)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산마늘이 있었는데, 오늘날 재배하는 마늘은 기원전 1~2세기경 중국 진(晉)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誌)에 한나라 장건이 호지(胡地;서역(西域)에서 큰 마늘(蒜)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어 호산(胡蒜), 또는 대산(大蒜)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유사의 건국신화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식품이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입추(立秋) 후 해일(亥日)에 마늘밭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대에 이미 약용·식용작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해에는 언제부터 마늘이 재배되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나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선남선녀가 남해에서 생활하면서 돌에 새겼다는 전설이 담긴「서불과차」와 100여기에 이르는 지석묘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사람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 마늘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 만들어진 이집트 쿠프왕의 피라미드 벽면에 새겨져 있는 상형문자에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한 노동자들에게 마늘과 양파 등을 먹이는데 소요되는 경비가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완성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마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스태미나 증강을 위해 마늘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치료제로 활용했던 마늘의 역사

중국의학, 일본 의학, 이슬람 의학,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 등 세계 각국의 민족의학에서는 이미 일찍이 마늘을 질병치료 및 예방에 다양하게 활용해 온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중국에서는 마늘차가 오래전부터 발열, 두통 그리고 콜레라로 인한 장염에 활용되어져 왔고,
일본에서는 미소시루라는 일종의 된장국에 마늘을 넣어 감기로 인한 발열, 두통, 인후통 등에 활용되어져 왔다.
기원전 1150년 전에 기록된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심장이상, 두통, 상처, 벌레물린데 혹은 암 등에 마늘을 활용한 처방 22개가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네로왕시대의 식물학자였던 다이오스코리데스(Dioscorides)는 마늘의 효능에 대하여 피를 맑게 하는 영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clear the arteries")
그리고 고대이집트의 기록에는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노동자들에게 매일 마늘을 먹게하여 건강한 상태에서 대 건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마늘은 로마시대부터 세계 1차 대전까지 전장에서 군인들로 하여금 감염을 막는데 습포제로 활용되기도 했다.
1853년 초 유명한 미생물학자인 파스퇴르는 마늘이 박테리아를 죽인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내기도 했다.
1916년 영국정부는 전쟁기간동안 공공의 건강증진을 위해 마늘공급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공표하기도 했다.
마늘은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페니실린“이라고 불리 우기도 했다. 그 이유인즉 항생제가 모두 소진되어 없을 때 군인들에게 고래로부터 사용되어져 온 마늘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산도스 제약회사는 마늘제제를 이용해 위장관 경련 약물을 만들기도 했으며, 반패튼 회사는 마늘을 이용하여 혈압강하제를 만들기도 했다.